
Artists
· 곽이브 Eve Kwak
· 김경태 Kyoungtae Kim
· 김도균 KDK
· 김주리 Juree Kim
· 안초롱 Chorong An
· 오가영 Kai Oh
· 오제성 Jeisung Oh
· 유아연 Ahyeon Ryu
· 전명은 Eun Chun
관람안내
전시기간 2026. 5. 8 (금) – 7. 11 (토)
관람시간 | 화 – 토 오후 12시 – 6시(매주 일, 월 휴관)
입장료 | 무료
하이트컬렉션
(06075) 서울시 강남구 영동대로 714 하이트 진로빌딩 B1, 2F
기획 | 이성휘, 이선주
그래픽 디자인 | 홍은주김형재
전시 공사 | 김준호
운송 설치 | 준아트
영상 설치 | 미지 아트
주최 | 하이트문화재단
Referential
Eve Kwak, Kyoungtae Kim, KDK, Juree Kim, Chorong An, Kai Oh, Jeisung Oh, Ahyeon Ryu, Eun Chun
May 8 – July 11, 2026
Tuesday – Saturday, 12 pm – 6 pm
HITE Collection
714 Yeongdong-daero, Gangnam-gu, Seoul, 06075 Korea
Curated by Sunghui Lee, Sunju Lee
Graphic Design by Eunjoo Hong Hyungjae Kim
Hosted by HITE Foundation
Supported by HITEJINRO Co.,Ltd.
레퍼런셜 1
2017년, 나는 하이트컬렉션의 전시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에 참여한 전명은의 사진 작업 <누워 있는 조각가의 시간>(2016)을 통해 조각가 전국광을 처음 알게 되었다. 전명은은 부친 전국광의 벗이었던 조각가 조성묵의 병문안을 다녀온 뒤, 오래전 세상을 떠난 부친을 떠올리며 그의 작업실에 남아 있던 석고 원형과 마케트를 촬영했다.1 전국광의 조각뿐 아니라 전명은이 어디선가 구한 화석처럼 마른 가시나무의 사진도 포함된 <누워 있는 조각가의 시간>을 나는 디지털 파일로 받아 태블릿 액정 화면 위에서 손가락으로 확대하고 축소하며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그때만해도 나는 어느 것이 조각이고 어느 것이 나뭇가지인지 구분하지 못한 채, 액정 너머 조각의 표면을 만지작거렸다.
2022년, 나는 전명은의 제안을 받아 《전국광, 모더니스트》(웨스)를 기획했다. 전시 준비를 위해 드디어 실견하게 된 전국광의 조각은 전명은의 사진으로 먼저 접했던 인상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작업실 선반을 빼곡히 채운 작품과 모형에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고, 몇 차례 방문한 후에야 각각의 작업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나는 선험한 전명은의 사진을 머릿속에서 지워낼 수 없었고, 《전국광, 모더니스트》는 내게 조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고민을 실질적으로 안긴 전시였다. 이후 지난 겨울에는 전국광 조각의 동시대성에 관한 발표(서울시립미술관, 2025)까지 하게 되자, 사진(이미지)가 조각을 경험하는 경로일 뿐 아니라 아예 다르게 감각하게 만드는 전제가 되어 버린 개인적이면서도 동시대적인 상황을 전시로 기획해야만 할 것 같았다. 거의 100년 전인 1927년에 이미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는 신문 삽화로 쓰인 사진들이 범람하는 상황을 ‘사진들의 눈보라’라고 칭하면서 앞으로의 상황을 예단했다. 그에 의하면, 기억이 쌓아온 댐을 사진의 홍수가 휩쓸고 가면서 우리는 더 이상 사진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게 됐다.2 그러므로 내가 (전명은의) 사진으로 (전국광의) 조각을 먼저 만난 것은 개인적 우연이 아니라 이미 오래된 지각의 조건인 셈이다.
사실 사진과 조각의 관계를 묻는 일은 새롭지 않다. 약 200년 전, 사진이 등장한 직후부터 조각은 사진의 핵심적인 피사체였다. 부동하는 석고와 대리석은 긴 노출 시간이 필요했던 초기 사진 기술에 이상적인 피사체였고, 사진가들은 조각을 반복해서 촬영했다. 초기 조각 사진은 조각의 기록 차원에서 생성되는 이미지처럼 여겨지기도 했으나, 각도, 조명, 배경에 대한 선택과 결정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사진은 조각에 대한 해석이었다고 말해야 한다. 사진과 조각의 관계를 연구한 미술사학자들은 사진은 등장한 이래로 조각의 역사 서술 자체를 구성해온 매체라고 입을 모은다.3 미술사의 고전인 『미술사의 기초개념』(1915)을 집필한 뵐플린은 양식적 이항 대립에 관한 그의 유명한 논의를 펼치는데 있어서 사진을 중요하게 이용했는데, 사진은 조각을 하나의 완결된 시점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확고한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4 사실상 미술사는 사진을 통해서 관람자가 조각 주위를 거닐다 멈춰 서야 할 단 하나의 순간을 지정해온 것이다. 메건 R. 루크는 이를 ‘인공적 맹목(artificial Blindness)’이라 칭하며, 사진이 조각의 사물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특정 측면만을 가시화함으로써 나머지를 체계적으로 비가시화 해왔음을 지적했다.5 그러므로 우리에게 익숙한 조각의 역사는 사진이 허용한 조각의 역사일지 모른다.
사진이 등장하자마자 조각가들도 조각과 사진을 넘나들며 작업했다. 로댕은 자신이 직접 조각을 촬영하지는 않았지만 외젠 드뤼에(Eugène Druet)나 에드워드 스타이켄(Edward Steichen)과 협업하며 조각을 어떻게 이미지화 할 것인지 구상했고 본인의 조각을 촬영한 사진을 전부 컨트롤한 것으로 유명하다.6 로댕, 로쏘, 브랑쿠시와 같은 조각가들은 가장 물질적인 조각을 만들면서도 사진을 통해서는 비물질화를 시도했다. 일례로 스타이켄이 달빛 아래에서 촬영한 로댕의 <발자크> 연작(1908)은 다양한 노출 시간을 적용해 촬영하여 초자연적인 유령이나 원래 형체를 잘 알아볼 수 없는 검은 실루엣 사진으로 조각을 비물질화한 이미지였다7. 인상주의적 조각으로 유명한 로쏘는 로댕이 자신의 인상주의적 양식에 크게 빚지고 있다고 확신하여 자신의 작업과 로댕의 작품을 근접하게 배치해줄 것을 요구했다. 로댕은 사진만 출품하여 로쏘를 피하려 했으나 사진을 통해서도 의심을 확증해주었을 뿐이라는 일화가 전해진다.8 상당량의 사진 작업을 남긴 브랑쿠시는 생전에 자기 작품을 타인이 촬영한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촬영 실력과는 상관없이 사진을 통해서 시간, 공간, 심지어 물질 그 자체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난 조각을 실천하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조각을 비물질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진을 이중 노출하기도 하였고, 일부러 진동하는 듯한 모습으로 촬영하기도 했다.9 한편, 뒤샹의 레디메이드는 알프레드 스티글리츠나 만 레이의 사진을 통해서 사물에 머물지 않고 한층 더 예술적인 아우라를 획득했다.10 스티글리츠는 뒤샹의 <샘(Fountain)>(1917)을 정교한 조명과 구도를 통해 공산품 변기를 마치 좌대 위의 조각처럼 보이게 만들었는데, 카메라 렌즈를 통해 사물을 새롭게 보게 만드는 것은 그 자체로 조각적 창조에 버금가는 행위였다.11 만 레이 역시 뒤샹의 작업을 촬영할 때, 사물을 아주 클로즈업하거나 기이한 각도에서 촬영하여 그것이 원래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게 만드는 사진을 많이 남겼다. 3차원을 2차원적으로 압축한 듯 공간의 왜곡을 의도적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이 경우 우리는 실제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사진작가가 설계한 시각적 환영을 보는 것이 된다.12
한편, 사진의 등장과 함께 이미지는 장치(apparatus)가 생산하는 것이 되었다. 빌렘 플루서는 ‘기술적 영상’, 즉 사진의 등장을 인류의 인식 체계가 전환되는 사건으로 읽었다. 그는 기술적 영상이 모든 역사를 자신 속으로 빨아들여 사회라는 영원히 순환하는 기억저장소를 만들어 내고, 결국 기술적 영상으로 처리되지 않는 그 어떤 예술적, 과학적, 정치적 행동도 존재하지 않으며, 사진, 영화, 비디오화 되고 싶지 않은 그 어떤 일상행위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13 플루서는 이를 묵시록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자 했고, 사진이 세계를 재현한다고 믿지만 실상은 장치의 프로그램이 허용하는 가능성의 범위 안에서만 생성됨을 지적했다.14 장치는 장치가 볼 수 있는 것만 본다. 오마르 콜레이프는 이 조건이 디지털 환경에서 더욱 전면화되어 예술은 스크린과 네트워크를 통해 경험되며, 예술의 공간성, 촉각성, 진정성은 더 이상 지배적인 기준이 아님을 지적했다.15 그럼에도 우리는 물질적 오브제로서의 예술과 디지털 이미지로서의 예술 사이의 긴장을 논의해야 한다. 특히 작금의 (사진) 이미지는 더 이상 빛의 감광이 아닌 데이터의 연산, 카메라가 아닌 알고리즘으로 생성되고 있으니 말이다.
얼마전 사진 관련 전문가들의 라운드테이블을 아트포럼이 진행했다.16 여기서 토마스 데만트는 필름 스톡의 단종, 인화지의 생산 중단, 마운팅 재료의 소멸이라는 산업적 변화 앞에서 자신이 구리판 위에 직접 인화하는 방식으로 전환하여 촉각적 퀄리티(haptic quality)를 추구하고 있는 상황을 이야기했다. 그는 자신은 사진적인 것이 종이나 특정 인화 형식일 필요가 없으며, 카메라 앞의 세계, 장치, 그리고 그 뒤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이라는 방정식이 관람자에게 인식되는가가 중요하다고 했다. 스크린 위의 이미지가 넘쳐나는 지금 아날로그 프린트의 사물성이 더욱 중요해지는 것이다.17 사진적인 것이 소멸의 위기에 처하고 있다고 본다면, 그럴수록 조각적인 것을 욕망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한편, 이 라운드테이블에서 록사나 마르코치는 카야 실버만을 인용하여 사진 이미지를 지표도, 재현도, 복사도 아닌 유비(analogy) 개념으로 보기를 제시했다.18 라운드테이블의 참여자들은 사진을 보존하는 것과 전시하는 것 사이의 균형에 대해서도 논하는데, 물질적 차원뿐 아니라 개념적 차원에서도 사진을 고유한 원본으로 볼 것인지, 스코어(악보)처럼 재현 가능한 프로토콜로 볼 것인지 좀 더 먼 미래를 대비하고자 한다.19 이들의 대화를 보면 확실히 AI는 디지털 사진에 대한 위협으로도 작용하지만, 보존 도구로서도 가능성을 지닌다. 아이러니한 것은 아날로그가 오히려 그 물성과 지표성 때문에 AI 시대에 새로운 의미를 얻고 있는 점이다. 사진의 조건과 상황에 대한 질문은 기술, 보존, 윤리, 역사 모두와 얽혀 있기에 아마도 그 답을 찾는 일은 영원히 미래의 일이 될 수도 있겠다.
조각의 상황은 사진과 반대이면서도 비슷해 보인다. 디지털 환경에서 사진적인 것이 물질적 차원을 욕망하는 동안, 조각적인 것은 데이터화와 네트워크화를 내면화 하기 시작했다. 조각은 물질에서 출발하기 보다 가상공간이나 프로그램 안에서 데이터로서 출발한다. 3D 모델링, 스캐닝, 디지털 드로잉 등을 통해 계획, 제작되는 조각은 물질적 존재감보다는 (사진 또는 그래픽의 총체인) 이미지로서 더 강렬하게 각인된다. 과거의 조각이 물질로서 확고부동할 수 있었다면, 이제 그들을 포함한 모든 조각은 이미지로서 무한/영원을 획득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상술한 내용은 이번 전시《레퍼런셜》에 참여한 작가들에게 고스란히 해당한다.
먼저, 전시의 출발점인 전명은은 <김윤신의 작업실>(2025) 시리즈에서 원로 조각가의 작업 과정에 쓰인 소도구들을 조각과 동등한 스케일의 이미지로 제시한다. 브랑쿠시가 사진 이미지를 조각적 실천의 연장으로 삼았다면, 전명은의 카메라는 반대 방향에서 움직였다. 그는 정체/용도가 분명치 않은 사물을 피사체로 두고 그 안에 잠재된 조각성을 끌어내고자 했다. 전시의 포스터 이미지로 사용된 <무제(레퍼런셜)>(2026)은 전명은이 클라리스 리스펙토르의 소설 『달걀과 닭』에서 영감을 받아 촬영한 사진이다. 브랑쿠시의 <세계의 시작>(1924)을 연상시키기도 하는 이 작품은 닉 드레이크의 <One of These Things First>의 노래말처럼 그 밖의 많은 다른 사물이 될 수도 있었으나 원초적인 조각의 어떤 형태이기를 희망한다.
김도균은 5년에 걸쳐 흐린 하늘을 대형 필름 카메라로 촬영하고, 이를 디지털 데이터로 변환했다가 다시 아날로그 필름으로 전환하여 흑백 인화했다. 반복된 피사체인 하늘은 제임스 베닝의 영화 <Ten Skies>(2004)를 연상시킨다. 에리카 발섬은 베닝의 영화 속 구름을 매 순간 새롭고 유일하며 언어나 이미지로 따라잡을 수 없는 대상이라 여겼다.20 하늘은 형태가 없으면서 끊임없이 형태를 만들고 3차원이면서도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다. 김도균이 5년간 반복해서 올려다본 하늘도 매 순간 개별적인 하늘이었지만, 반복된 바라봄은 사진적 논리의 문제로 환원되기도 한다. 그가 많은 하늘에서도 한없이 바라본 것은 사진의 중간 회색으로 적정 노출의 기준값이자 특정 순간을 초월한 사진의 어떤 평균적 상태다.
오제성은 조각의 성립 조건을 질문하기 위해 한국 근현대 조각을 참조한다. 특히 해상도가 낮거나 흐릿한 사진–크라카우어의 언어로는 대상의 이미지가 빠져나간 잔여물–을 그대로 쓴다. <보주>(2023)를 비롯한 <쿼팅>(2023) 시리즈에서는 한국 근현대 조각을 현재의 산업 소재와 맥락을 지닌 요소들로 재해석한다. 부친인 조각가 오상욱의 작업을 3D 모델링으로 재제작한 <토르소>(2026)에서도 같은 논리가 작동한다. 그러면서 그는 모델링-거푸집-주조의 과정이 모델링-스캔-출력으로 대체되고 있을 뿐, 근본적인 조각의 성립 조건이 변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윌리엄 미첼이나 여러 이론가들은 디지털 이미지는 이미 지표성을 상실했다고 주장하고 이를 사진의 존재론적 전환으로 보았기에,21 작금의 물리적 세계와의 인과 관계는 이전과 다른 토대 위에서 형성되는 것일테다.
김경태의 <을지로 앵글스>(2019)는 수많은 객관적 정보를 담고 있는 건축 도면조차 누락할 수밖에 없는 자재의 질감과 접합 방식과 같은 디테일을 사진으로 포착했다. 그의 사진은 메건 루크가 말하는 ‘인공적 맹목’의 논리를 역으로 활용한 셈인데,22 건물의 전체는 비가시화했지만 대신 모서리만을 극단적으로 가시화함으로써 사진이 3차원 공간을 선택적으로 조각하는 방식을 드러냈다.
김주리는 소멸을 전제로 탄생한 조각의 소멸 과정을 기록한 영상과 사진, 그리고 소멸의 시간이 당도하기 전, 물질적 정점에 있는 상태로서 조각을 제시한다. 그에게 (영상/사진) 이미지는 조각의 시간을 목격하고 증언하는 역할로서 필수적이다. 티노 세갈이 자신의 퍼포먼스 촬영을 금하여 원칙적으로는 기록을 거부하는 것과 반대인 셈인데, 이미 이미지의 확산 현상은 시스템 상에서 컨트롤 되지 못하는 일이므로 작가가 이미지의 생애를 치밀하게 지켜보는 일도 중요하다.
안초롱은 신체가 매개가 되어 원본과 복제, 실재와 반사의 경계가 해소되는 현장을 포착했다. 그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이 작업은 이미지가 신체를 어떻게 호출하고, 또 그 움직임을 어떻게 정렬시키는지에 대한 관찰에서 출발했다”고 밝힌 바 있다. 싱가포르 쇼핑몰에서 K-pop 안무를 따라 추는 사람들은 거울 반사되는 이미지를 통해 스스로의 몸을 조율하고, 반대로 이미지는 몸을 통해서 실재로 돌아온다. 로댕과 같은 조각가들이 실체적 몸을 참조한 조각을 만들었다면, 이제 우리가 창조하는 몸은 이미지 속에 있다고 해도 될 것이다. 한편, 안초롱이 사용한 A4 복사용지는 사진이 물리적 토대 없이 존재하기 어렵지만, 이 물리적 토대가 무엇으로든 대체되고 반복 출력될 수 있음을 드러낸다. 사실 사진이 선택할 수 있는 평면은 무한한 조건일지 모른다.
곽이브는 이미지가 공간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전시장 안에서 작동시킨다. 고속도로 방음벽의 버드세이버 이미지, 적벽돌 이미지 등 기사용했던 이미지들을 전시장의 표면으로 재사용한다. 그의 ‘재생(playback)’의 전략은 이미지가 한 번 만들어진 뒤에도 다른 표면 위에서 다른 의미로 재생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럼으로써 전시 수단의 한시적인 존재로 소멸하지 않으며, 오히려 우리가 언제든지 그의 이미지 세계에 다시 소환되어 어슬렁거리는 존재임을 상기시킨다.
유아연은 대중의 욕망에 맞게 가공된 여성 캐릭터를 모델링으로 구현하고 이를 파편적인 신체로 분해해 진공 포장했다. 조각적 오브제로 물질화된 이미지의 이면에는 오늘날 디지털 플랫폼이 신체와 욕망을 상품화하는 구조, 자본주의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이 메커니즘을 통해서 이미지의 아우라는 원본이 아니라 시스템 속에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오가영은 사진에 담기지 않는 것 중에서도 온기에 주목했다. 작가의 지난 몇 달 간 뉴욕에서의 일상은 사진과 여러 물성들의 콜라주 형태로 한국에 도착했고, 합판 구조물에 끼워진 상태로 전체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음으로써, 우리가 사물의 시공간적 경험을 알아차리기 힘들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작가는 데이터로 치환되지 않는 감각이 여전히 존재함을, 손톱과 별모양 글리터로 블링블링하게 장식하고 손 모양을 따라 접힌 채 전시장 벽에서 달랑달랑 흔들리는 낱장의 사진으로 대신한다.
이제 AI 시대라고 하자. 이 AI가 참조, 학습한 데이터에는 수억 수조 분량의 실제 사진들의 통계적 패턴이 압축되어 있다. 이들은 텍스트 명령이라고 할 수 있는 특정 프롬프트를 지표로 삼는다. 원래 사진의 지표가 피사체였다면, AI가 생성하는 이미지는 인간의 언어적 의도가 지표 또는 지표적 흔적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 생산되고 있는 이상, 이제 이미지는 우리의 현실과 세상을 함께 생산하는 주체적인 입장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마치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솔라리스(1972)23의 바다처럼 인간의 기억과 감정을 읽고 물질의 형태로 손님처럼 나타나 우리 사이에 공존하는 것이다.
글/ 이성휘
- 전명은, 정희승, “전명은–정희승: 대화” 및 도판,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서울: 하이트문화재단, 2017), 231-260. ↩︎
-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 「사진」, 『대중의 장식: 바이마르 에세이들』, 이창남 옮김(서울: 새물결, 2026), 44-45. ↩︎
- Sarah Hamill and Megan R. Luke, “Reproductive Vision: Photography as a History of Sculpture,” Photography and Sculpture: The Art Object in Reproduction, eds. Sarah Hamill, Megan R. Luke (Los Angeles: Getty Research Institute, 2017), 1-4. ↩︎
- Heinrich Wölfflin, “How One Should Photograph a Sculpture,” trans. Geraldine A. Johnson, Art History 36, no.1 (February 2013), 58-59. Sarah Hamill and Megan R. Luke, “Reproductive Vision: Photography as a History of Sculpture,” in Hamill and Luke, Photography and Sculpture, 3-4에서 재인용. ↩︎
- ‘인공적 맹목’은 워커 에반스(Walker Evans)가 『Fortune 52』(1955년 7월호)에 발표한 “일상 도구의 아름다움”에서 사용한 표현. 이를 메건 루크가 인용함. Megan R. Luke, “Artificial Blindness: Objecthood and the Photography of Sculpture,” in Hamill and Luke, Photography and Sculpture, 138. ↩︎
- Geraldine A. Johnson, “‘All concrete shapes dissolve in light’: photographing sculpture from Rodin to Brancusi,” Sculpture Journal 15, no.2 (Liverpool: Liverpool University Press, 2006), 202. ↩︎
- Geraldine A. Johnson, ibid., 201-204. ↩︎
- Geraldine A. Johnson, ibid., 204-205. ↩︎
- Geraldine A. Johnson, ibid., 216-220. ↩︎
- Anne McCauley, “Sleight of Eye,” in Hamill and Luke, Photography and Sculpture, 153-174.
↩︎ - Menno Hubregtse, “Robert J. Coady’s “The Soil” and Marcel Duchamp’s “Fountain”: Taste, Nationalism, Capitalism, and New York Dada,” Canadian Art Review, vol.34, no.2 (2009), 28-32. ↩︎
- Anne McCauley, ibid., 169. ↩︎
- 빌렘 플루서, 『사진의 철학을 위하여』, 윤종석 옮김(서울: 커뮤니케이션북스, 1999), 1-20. ↩︎
- 빌렘 플루서, 위의 책, 21-38. ↩︎
- Omar Kholeif, Goodbye, World! Looking at Art in the Digital Age (Berlin: Sternberg Press, 2018), 173.
↩︎ - Ketuta Alexi-Meskhishvili, Thomas Demand, Florian Ebner, Roxana Marcoci, Christian Scheidemann, Jeff Wall, and Pablo Larios, “The Future of Photography: A Roundtable,” Artforum, November 2025, https://www.artforum.com/issue/2025/november-2025-1234736604. Accessed December 8, 2025. ↩︎
- Thomas Demand, ibid. ↩︎
- Roxana Marcoci, ibid. 실버만에게 사진은 인간이 발명한 장치이기 보다 세계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존재의 유사성과 차이를 모두 내포한다. 그는 사진을 존재의 흔적이나 부재와 같이 과거 지향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경계하며,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처럼 초시간적이고 기적적인 유비임을 주장한다(Kaja Silverman, The Miracle of Analogy or The History of Photography, Part 1 (Stanford, CA: Stanford University Press, 2015), epub edition, chap. 6).
↩︎ - Ketuta Alexi-Meskhishvili, Thomas Demand, Florian Ebner, Roxana Marcoci, Christian Scheidemann, Jeff Wall, and Pablo Larios, ibid. ↩︎
- Erika Balsom, Ten Skies (Fireflies Press, 2021), 89-105. ↩︎
- William Mitchell, The Reconfigured Eye: Visual Truth in the Post-Photographic Era (Cambridge, MA: MIT Press, 1992), 19-23. ↩︎
- Megan R. Luke, ibid. ↩︎
- 이 영화의 원작은 스타니슬라프 렘의 SF 소설『솔라리스』(1961). ↩︎